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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회사법인 미실란(美實蘭). 이름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 친환경농법으로 발아현미를 생산·가공·판매한다. 11월이면 미실란 20년이다. 10월25일에 이를 축하하는 작은 행사가 열렸다. 100여 명이 참석했다. 폐교 자리에 들어선 미실란 운동장에서 풍물놀이와 음악회가 열렸다.
이동현 미실란 대표(56)는 ‘농부 과학자’다. 이 대표는 본인을 ‘농사짓는 농부, 쌀·미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 농업법인 대표’라고 소개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기에 ‘생태·지역·사회운동가’를 추가해도 될 듯하다. 게임릴사이트 미실란 20년과 그전의 이력이 그렇다. 그동안 우직한 태도로 자연과 사회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이 있었고, 그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실란 들녘에 선 이동현 미실란 대표와 아내 남근숙 미실란 이사. 손오공릴게임 ⓒ시사IN 조남진
그는 1988년 국립순천대 농생물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농생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2학년 때 지도교수인 고영진 교수가 그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10년 후 자네 인생을 생각해본 적 있나?” 그날 밤, 대학생 이동현은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했다. “그 질문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농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규슈 대학 생물자원환경과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간 것도 고영진 교수의 권유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3년 동안 동물 배설물 속의 미생물을 연구했다. 71개 동물의 배설물로 식성 골드몽릴게임 에 따라 미생물을 분류했다. 해충방제에 도움이 되는 연구였다. ‘그때가 화양연화의 시기’라고 떠올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인정도 받았다. 3년 동안 박사논문 말고도 논문 일곱 편을 더 발표했다. 유학 중에 한 달 ‘연구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와서는 ‘야생동물 소모임’ 회원들과 지리산 등에서 야생동물 배설물을 채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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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는데, 그 이후가 갈림길이었다. 두 대학의 교수 자리에 지원했다. 논문 실적이 좋아서 꽤 기대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미생물 연구로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을 때였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 ‘한국은 실력보다 줄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게 무척 싫었다. 두 군데 대학에서 안 받아주니 자존심이 상했다. 일본의 지도교수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다시 오라’고 했다. 면담 전에는 ‘연구를 이어가겠습니다’ 하려 했는데, 그 질문을 받고 나도 모르게 ‘벤처 창업을 하겠다’고 해버렸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경제적 문제가 컸던 것 같다. 형편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빨리 정착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2004년 9월에 미생물로 병충해를 방제하는 벤처회사를 창업했다. 미생물을 활용한 농약 특허를 세 개 내고, 제품을 팔려고 하니 판로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순천시청 공무원이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추천했다. 5기로 입학해 생산에서 마케팅까지 공부했다. 그때 만난 곡성군청 공무원과의 인연으로 곡성군에서 특강을 했다. 일본 유학을 한 박사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업회사법인을 운영하려고 한다니, 관심을 모았다. 강연을 들은 당시 곡성군수가 폐교 자리를 10년 무상 임대해주고, 지원을 많이 할 테니 ‘곡성으로 오라’고 했다. 그 제안에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설립한 게 2005년 11월이고, 가족이 곡성으로 이주한 게 2006년 5월이다. 곡성으로 이주하고 한 달 뒤 지방선거에서 군수가 낙선하는 바람에 임대 조건 등이 바뀌어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미생물 연구에서 발아현미 연구로
발아현미는 현미에 적당한 수분과 온도와 산소를 공급해 싹을 틔운 쌀이다. 처음에는 가족 건강 때문에 발아현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어머니가 위암으로 투병 중이고, 둘째 아들이 아토피가 심했다. 기능성 식품인 현미를 갈아 음식을 만들곤 했다. 어머니가 농사를 더 이상 지을 수 없어 고향 고흥의 땅을 팔았는데, 때마침 그 땅을 산 농부가 현미 발아기 기술자였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이 만든 발아기의 발아율이 너무 낮은데, 당신이 과학자니 도와달라’고 했다.
미실란 복도에는 초창기에 심은 벼 품종 250여 종이 전시돼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동현 박사가 발아현미 관련 논문을 찾고, 대학에 있는 지인들에게 분석을 부탁해 발아율이 높은 품종을 그에게 추천했다. 이웃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발아현미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농부가 ‘당신이 발아현미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전까지는 미생물 연구만 했다. 사업체를 만들면서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발아현미 해보라는 말을 들은 거다. 늘 팔 수 있는 게 식량이고 국민들이 많이 먹는 게 쌀이니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해보자 싶었다.” 큰돈을 들여서 그 농부의 발아기를 구입했다. 묵직한 1호 발아기에 ‘장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연구·개발한 4호기는 ‘배려’라고 이름 지었다. 이전 모델은 현미 용기를 빼는 데 힘이 들었는데, 4호기는 여성 직원들도 쉽게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며 이 이름을 붙였다.
미실란 초창기 때 이동현 대표는 발아현미에 적합한 벼 품종을 찾느라 애를 썼다. 278종의 벼 품종을 논에 한 줄씩 심었다. 벼농사가 가능한 쌀 품종을 곡성 논에 심고 친환경 농법으로 길러 비교해보자는 시도였다. “당시에 유명 농부들이 주로 일본 품종을 사용했다. 한국 품종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남들이 안 해본 것 같아서 내가 해보자 했다. 일본 벼, 중국 벼, 토종벼 등 278개 품종을 구획을 나누어 심고 키워 분석했다.” 이 중에서 삼광벼가 곡성에서 잘 자라고 현미 발아에도 적합했다. 이동현 대표의 이런 활동이 소문났다. 농촌진흥청에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2007년 4월부터 농촌진흥청과 미실란이 ‘발아현미용 품종 선발 및 산업화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연구·개발하는 ‘농부 과학자’의 농업회사법인이라는 점 말고도 미실란에는 특별한 게 있다. 지역·공동체·문화에 대한 관심이다. 좁게는 회사 직원들, 넓게는 곡성 지역을 염두에 둔다. 이동현 대표는 “저나 아내 남근숙 이사(53) 둘 다 엔지오(NGO)적 성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하면 멈칫한다”라고 말했다. 미실란은 2015년 8월에 ‘밥카페 반하다’를 열었다. 더 많은 이들이 미실란을 찾아와 들판을 보고 발아현미밥을 먹어보면 쌀과 농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로 밥집을 열었다. 재료가 좋은 건강한 밥상으로 유명해졌다. 대기가 두 시간씩 될 정도로 인기 있었지만 한두 해 전부터는 개인 손님을 받지 않는다.
장사가 잘되는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서비스 요구가 점점 늘어나고, 직원들이 지쳐갔다. 어느 날, 직원 세 명이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긴 시간 대화 없이 들녘만 멍하니 바라보더라. 그날, 쉬었다 가자고 결정했다. 그해에 2만명 가까이 밥카페에 올 거로 예상했다. 돈은 벌겠는데,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겠더라. 좋은 발아현미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생산에도 신경이 덜 가겠다 싶었다. 장사가 너무 잘돼서 밥카페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대표’라고 한다. 막 물이 들어오는데 노를 더 젓는 게 아니라 항구를 닫았으니(웃음).”
이동현·남근숙 부부는 지역의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11년 곡성교육희망연대를 만들어 2024년 해산할 때까지 활동했다. 곡성에서 자라는 어린이·청소년 교육을 지역이 함께 궁리하고 개선책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 교육 강좌와 학부모 간담회를 열고,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4년 반 동안 매주(막바지에는 매달) 곡성에서 촛불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화가 있는 쌀집 회사”
이동현 대표는 곡성과 인근 지역의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추수 체험교육 등 농업 생태교육을 꾸준히 해왔다. 모내기를 하고, 논 생물종 다양성 조사 활동을 하고, 추수 체험을 한다. 곡성유치원은 11년째 미실란을 찾는다. 최근 추수 체험교육을 온 구례 원천초 학생·학부모들이 미실란 들판에 허수아비 세 개를 남기고 갔다. 이 대표는 “유치원생 때부터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야 성인이 됐을 때 기후·생태 문제를 몸으로 느끼지 않겠는가. 미실란의 생태교육이 지구를 지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동현 대표는 미실란을 ‘문화가 있는 쌀집 회사’라고 표현했다. 2006년부터 미실란 작은들판음악회를 열었다. “문화 행사는 남근숙 이사가 주도했다. 대학 때 기타 동아리 후배들을 섭외해서 음악회를 열었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올 수 있도록 ‘술 없는 음악회’, 음악이 이러니저러니 ‘평가 없는 음악회’, 과도한 의전이 없이 어울리는 ‘경계 없는 음악회’다. 32회까지 열었다. 200~300명가량 참석한다.” 작은 영화 상영회도 미실란에서 열었는데, 그게 확장돼 섬진강마을영화제가 됐다.
이동현 대표의 아들 이재혁씨(가운데)는 농대 졸업 이후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동현 대표는 1년에 두세 번은 새만금에 간다. 유학 시절 한국에 와서 만난 ‘야생동물 소모임’ 회원들이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 활동을 많이 했다. 갯벌 미생물 분석을 요청받아 귀국한 이후에 매달 조사단 워크숍에 참가했다. 매번 아내와 당시 유치원생이던 두 아들과 함께 새만금에 갔다. 조사단 사람들은 두 아들을 ‘최연소 환경운동가’라고 불렀다. 그때 갯벌을 누비던 이재혁씨(26)와 이재욱씨(24)는 각각 농부와 미생물 과학자로 진로를 정했다. 전남대 농대를 졸업한 재혁씨는 미실란 일을 도우며 올해 처음으로 1200평에 개인 농사를 지었다.
5년째 미실란과 함께하는 소설가 김탁환 작가는 미실란의 활동을 ‘물꼬와 둠벙’에 비유했다. ‘미실란 20살 생일 파티’ 초대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물꼬와 둠벙은 벼농사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물꼬를 제대로 여닫지 않으면 논물을 대지 못해 벼들이 시들거나 죽고, 기후위기로 인해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는 논 옆에 물을 채운 둠벙이 없다면 논물이 마르고 벼들은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 지구 생태계와 건강한 농업·농촌을 지키기 위해 물꼬와 둠벙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미실란이 되겠습니다.’ 미실란의 다짐이다.
지역에 책방이 없어서 외지로 책방 체험을 하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동현 대표는 김탁환 작가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만들었다. ⓒ시사IN 조남진
얼마 전 이동현 미실란 대표는 7박9일로 캐나다에 다녀왔다. 현미발아 제품 수출을 위해서다. 그때 만난 해외 바이어들이 11월 중순에 미실란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이들에게 곡성군에 있는 다른 대여섯 개 농업법인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굳이 왜? 이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지역이 영세해 지자체에서 해외 손님을 초대할 수도 없고, 미실란에만 오는 건 의미가 없잖나. 지역에 책방이 없어서 지역 아이들이 외지로 책방 체험을 가야 한다고 해서, 김탁환 작가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만들었다. 돈이 안 되더라도 이런 일이 생겨야 지역이 재미있어지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잖나. 만약 미실란만 돈을 많이 벌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면 미실란이 스스로 고립되는 거다. 지역이 살아야 미실란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김탁환 지음, 해냄 펴냄/ 〈각별한 당신〉 김종철 지음, 사이드웨이 펴냄
곡성·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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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미실란 대표(56)는 ‘농부 과학자’다. 이 대표는 본인을 ‘농사짓는 농부, 쌀·미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 농업법인 대표’라고 소개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기에 ‘생태·지역·사회운동가’를 추가해도 될 듯하다. 게임릴사이트 미실란 20년과 그전의 이력이 그렇다. 그동안 우직한 태도로 자연과 사회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이 있었고, 그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미실란 들녘에 선 이동현 미실란 대표와 아내 남근숙 미실란 이사. 손오공릴게임 ⓒ시사IN 조남진
그는 1988년 국립순천대 농생물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농생물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2학년 때 지도교수인 고영진 교수가 그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10년 후 자네 인생을 생각해본 적 있나?” 그날 밤, 대학생 이동현은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 오션파라다이스다운로드 했다. “그 질문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 서울대 농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규슈 대학 생물자원환경과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간 것도 고영진 교수의 권유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3년 동안 동물 배설물 속의 미생물을 연구했다. 71개 동물의 배설물로 식성 골드몽릴게임 에 따라 미생물을 분류했다. 해충방제에 도움이 되는 연구였다. ‘그때가 화양연화의 시기’라고 떠올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인정도 받았다. 3년 동안 박사논문 말고도 논문 일곱 편을 더 발표했다. 유학 중에 한 달 ‘연구 휴가’를 받아 한국에 와서는 ‘야생동물 소모임’ 회원들과 지리산 등에서 야생동물 배설물을 채집했다.
모바일바다이야기하는법
2003년 9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는데, 그 이후가 갈림길이었다. 두 대학의 교수 자리에 지원했다. 논문 실적이 좋아서 꽤 기대했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미생물 연구로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을 때였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 ‘한국은 실력보다 줄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게 무척 싫었다. 두 군데 대학에서 안 받아주니 자존심이 상했다. 일본의 지도교수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다시 오라’고 했다. 면담 전에는 ‘연구를 이어가겠습니다’ 하려 했는데, 그 질문을 받고 나도 모르게 ‘벤처 창업을 하겠다’고 해버렸다(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경제적 문제가 컸던 것 같다. 형편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빨리 정착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2004년 9월에 미생물로 병충해를 방제하는 벤처회사를 창업했다. 미생물을 활용한 농약 특허를 세 개 내고, 제품을 팔려고 하니 판로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 순천시청 공무원이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추천했다. 5기로 입학해 생산에서 마케팅까지 공부했다. 그때 만난 곡성군청 공무원과의 인연으로 곡성군에서 특강을 했다. 일본 유학을 한 박사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업회사법인을 운영하려고 한다니, 관심을 모았다. 강연을 들은 당시 곡성군수가 폐교 자리를 10년 무상 임대해주고, 지원을 많이 할 테니 ‘곡성으로 오라’고 했다. 그 제안에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설립한 게 2005년 11월이고, 가족이 곡성으로 이주한 게 2006년 5월이다. 곡성으로 이주하고 한 달 뒤 지방선거에서 군수가 낙선하는 바람에 임대 조건 등이 바뀌어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미생물 연구에서 발아현미 연구로
발아현미는 현미에 적당한 수분과 온도와 산소를 공급해 싹을 틔운 쌀이다. 처음에는 가족 건강 때문에 발아현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어머니가 위암으로 투병 중이고, 둘째 아들이 아토피가 심했다. 기능성 식품인 현미를 갈아 음식을 만들곤 했다. 어머니가 농사를 더 이상 지을 수 없어 고향 고흥의 땅을 팔았는데, 때마침 그 땅을 산 농부가 현미 발아기 기술자였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이 만든 발아기의 발아율이 너무 낮은데, 당신이 과학자니 도와달라’고 했다.
미실란 복도에는 초창기에 심은 벼 품종 250여 종이 전시돼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동현 박사가 발아현미 관련 논문을 찾고, 대학에 있는 지인들에게 분석을 부탁해 발아율이 높은 품종을 그에게 추천했다. 이웃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발아현미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농부가 ‘당신이 발아현미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전까지는 미생물 연구만 했다. 사업체를 만들면서 뭘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발아현미 해보라는 말을 들은 거다. 늘 팔 수 있는 게 식량이고 국민들이 많이 먹는 게 쌀이니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해보자 싶었다.” 큰돈을 들여서 그 농부의 발아기를 구입했다. 묵직한 1호 발아기에 ‘장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연구·개발한 4호기는 ‘배려’라고 이름 지었다. 이전 모델은 현미 용기를 빼는 데 힘이 들었는데, 4호기는 여성 직원들도 쉽게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며 이 이름을 붙였다.
미실란 초창기 때 이동현 대표는 발아현미에 적합한 벼 품종을 찾느라 애를 썼다. 278종의 벼 품종을 논에 한 줄씩 심었다. 벼농사가 가능한 쌀 품종을 곡성 논에 심고 친환경 농법으로 길러 비교해보자는 시도였다. “당시에 유명 농부들이 주로 일본 품종을 사용했다. 한국 품종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남들이 안 해본 것 같아서 내가 해보자 했다. 일본 벼, 중국 벼, 토종벼 등 278개 품종을 구획을 나누어 심고 키워 분석했다.” 이 중에서 삼광벼가 곡성에서 잘 자라고 현미 발아에도 적합했다. 이동현 대표의 이런 활동이 소문났다. 농촌진흥청에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2007년 4월부터 농촌진흥청과 미실란이 ‘발아현미용 품종 선발 및 산업화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연구·개발하는 ‘농부 과학자’의 농업회사법인이라는 점 말고도 미실란에는 특별한 게 있다. 지역·공동체·문화에 대한 관심이다. 좁게는 회사 직원들, 넓게는 곡성 지역을 염두에 둔다. 이동현 대표는 “저나 아내 남근숙 이사(53) 둘 다 엔지오(NGO)적 성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하면 멈칫한다”라고 말했다. 미실란은 2015년 8월에 ‘밥카페 반하다’를 열었다. 더 많은 이들이 미실란을 찾아와 들판을 보고 발아현미밥을 먹어보면 쌀과 농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로 밥집을 열었다. 재료가 좋은 건강한 밥상으로 유명해졌다. 대기가 두 시간씩 될 정도로 인기 있었지만 한두 해 전부터는 개인 손님을 받지 않는다.
장사가 잘되는데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서비스 요구가 점점 늘어나고, 직원들이 지쳐갔다. 어느 날, 직원 세 명이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긴 시간 대화 없이 들녘만 멍하니 바라보더라. 그날, 쉬었다 가자고 결정했다. 그해에 2만명 가까이 밥카페에 올 거로 예상했다. 돈은 벌겠는데, 직원들이 회사를 나가겠더라. 좋은 발아현미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생산에도 신경이 덜 가겠다 싶었다. 장사가 너무 잘돼서 밥카페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대표’라고 한다. 막 물이 들어오는데 노를 더 젓는 게 아니라 항구를 닫았으니(웃음).”
이동현·남근숙 부부는 지역의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011년 곡성교육희망연대를 만들어 2024년 해산할 때까지 활동했다. 곡성에서 자라는 어린이·청소년 교육을 지역이 함께 궁리하고 개선책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 교육 강좌와 학부모 간담회를 열고,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4년 반 동안 매주(막바지에는 매달) 곡성에서 촛불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화가 있는 쌀집 회사”
이동현 대표는 곡성과 인근 지역의 어린이·청소년을 대상으로 추수 체험교육 등 농업 생태교육을 꾸준히 해왔다. 모내기를 하고, 논 생물종 다양성 조사 활동을 하고, 추수 체험을 한다. 곡성유치원은 11년째 미실란을 찾는다. 최근 추수 체험교육을 온 구례 원천초 학생·학부모들이 미실란 들판에 허수아비 세 개를 남기고 갔다. 이 대표는 “유치원생 때부터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야 성인이 됐을 때 기후·생태 문제를 몸으로 느끼지 않겠는가. 미실란의 생태교육이 지구를 지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동현 대표는 미실란을 ‘문화가 있는 쌀집 회사’라고 표현했다. 2006년부터 미실란 작은들판음악회를 열었다. “문화 행사는 남근숙 이사가 주도했다. 대학 때 기타 동아리 후배들을 섭외해서 음악회를 열었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올 수 있도록 ‘술 없는 음악회’, 음악이 이러니저러니 ‘평가 없는 음악회’, 과도한 의전이 없이 어울리는 ‘경계 없는 음악회’다. 32회까지 열었다. 200~300명가량 참석한다.” 작은 영화 상영회도 미실란에서 열었는데, 그게 확장돼 섬진강마을영화제가 됐다.
이동현 대표의 아들 이재혁씨(가운데)는 농대 졸업 이후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이동현 대표는 1년에 두세 번은 새만금에 간다. 유학 시절 한국에 와서 만난 ‘야생동물 소모임’ 회원들이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 활동을 많이 했다. 갯벌 미생물 분석을 요청받아 귀국한 이후에 매달 조사단 워크숍에 참가했다. 매번 아내와 당시 유치원생이던 두 아들과 함께 새만금에 갔다. 조사단 사람들은 두 아들을 ‘최연소 환경운동가’라고 불렀다. 그때 갯벌을 누비던 이재혁씨(26)와 이재욱씨(24)는 각각 농부와 미생물 과학자로 진로를 정했다. 전남대 농대를 졸업한 재혁씨는 미실란 일을 도우며 올해 처음으로 1200평에 개인 농사를 지었다.
5년째 미실란과 함께하는 소설가 김탁환 작가는 미실란의 활동을 ‘물꼬와 둠벙’에 비유했다. ‘미실란 20살 생일 파티’ 초대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물꼬와 둠벙은 벼농사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물꼬를 제대로 여닫지 않으면 논물을 대지 못해 벼들이 시들거나 죽고, 기후위기로 인해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는 논 옆에 물을 채운 둠벙이 없다면 논물이 마르고 벼들은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 지구 생태계와 건강한 농업·농촌을 지키기 위해 물꼬와 둠벙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미실란이 되겠습니다.’ 미실란의 다짐이다.
지역에 책방이 없어서 외지로 책방 체험을 하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동현 대표는 김탁환 작가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만들었다. ⓒ시사IN 조남진
얼마 전 이동현 미실란 대표는 7박9일로 캐나다에 다녀왔다. 현미발아 제품 수출을 위해서다. 그때 만난 해외 바이어들이 11월 중순에 미실란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이들에게 곡성군에 있는 다른 대여섯 개 농업법인들을 소개하기로 했다. 굳이 왜? 이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지역이 영세해 지자체에서 해외 손님을 초대할 수도 없고, 미실란에만 오는 건 의미가 없잖나. 지역에 책방이 없어서 지역 아이들이 외지로 책방 체험을 가야 한다고 해서, 김탁환 작가와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만들었다. 돈이 안 되더라도 이런 일이 생겨야 지역이 재미있어지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잖나. 만약 미실란만 돈을 많이 벌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면 미실란이 스스로 고립되는 거다. 지역이 살아야 미실란도 같이 성장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김탁환 지음, 해냄 펴냄/ 〈각별한 당신〉 김종철 지음, 사이드웨이 펴냄
곡성·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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