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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집의 사각지대인 한국풍토에서 이 책은 단비와 같은 책이다.'

<이어령의 말> 편집위원 김민희의 말이다. 편집자들은 이어령의 글을 읽고 유의미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그 밑줄들이 날줄씨줄로 엮어 한 권의 책으로 우리 앞에 선물처럼 도착했다. 그렇다, 선물이었다.










▲ 이어령의 말 세계사/초판1쇄 2025년 2월 26일/가격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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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




<이어령의 말>은 이어령 선생의 경험과 철학, 인생을 압축해 놓은 사전(박연준 시인)이다. 이 사전은 총 아홉 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 인간, 문명, 사물, 언어, 예술, 종교, 우리, 창조'라는 사업자등록 신청 주제에 대해 이어령 선생이 여기저기에 풀어놓았던 말들을 씨줄날줄로 엮어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책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좋고, 관심이 있는 주제부터 읽어도 좋다. 하지만, 이 책은 앞에서부터 읽지 말고 '헌사'부터 읽기를 권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4장 '사물'편을 읽고 나서 '헌사'를 읽었다.
강병 외담대 인(서예가)를 위시하여 김대진(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문정(뮤지컬 음악 감독), 김윤주(뮤지션, '옥상달빛' 멤버), 김창완(뮤지션, 작가), 김현정(CBS PD), 박연준(시인) 등 다양한 분들이 밑줄 친 내용들을 소개하며 헌사를 썼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밑줄 친 곳과 같은 곳을 밑줄 친 분들로부터는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구나 전세보증금대출금리 ' 하는 기쁨이, 내가 지나쳤던 문장들은 다시 되새겨 읽으면서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게 됨으로 기뻤다는 점이다. 거기에 뒤이어 읽은 주제들에서는 '누군가 이 문장에 밑줄을 쳤었지' 하며, 다시 한 번 문장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까지 있으니 이 책은 순서대로 읽을 책이 아니라 '헌사'부터 읽을 책이다.
선물 같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 재무계산기프로그램 으면서 생각을 확장시킨다. 그렇게 때문에 이 책은 일독을 하고 책꽂이에 꽂혀질 책이 아니라, 머리맡에 두고 되새겨가며 읽어야할 책이다. 부제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의 바람은 밑줄 친 문장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단어'들로 잔잔하던 마음에 파문을 던진다. 점점 크게 퍼지는 파문은 그 한 문장으로 인해 수많은 생각들을 낳는다.
이어령 선생의 문장은 단문이지만, 단문에 들어있는 의미는 오래 가고 확장된다.
1장 '마음' 편 '행복'이란 글에는 '도마뱀을 천 배로 확대시켰다고 악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재산을 배로 늘린다고 행복도 배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예금통장의 액수가 커져갈수록 인간의 행복도 커질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이런 은유의 문장은 유머스러움을 옷 입고, 굳어버린 생각을 망치로 '팍' 내리쳐 깨뜨리는 것이다. '갓난아이를 열 배로 확대시켰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반복된 은유의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 새 생각의 변화가 감지된다.
이어령 선생은 '우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다. 이 책의 8장에서 '우리: 너 누구니'라는 주제로 다룰 정도다. 하지만, 우리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너' 혹은 '나'라는 개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마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부정할 때....당신만은 눈을 뜨고 깨어 있어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 1장 '마음' 중에서 27p


개인적으로는 4장 '사물: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부분이 가장 좋았다. 가구는 낡아질수록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 차 맛은 누구와 함께 마시느냐로 그 맛이 결정된다는 말, 언어는 화살처럼 허공을 날아간다는 말, 계단은 오르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 서재가 어두울수록 영혼은 밝아진다는 말, 창문은 어둠과 빛의 경계에 있는 상처라는 말, 카메라의 셔터 소리는 시간이 정지하는 소리라는 말... 이렇게 <이어령의 말>은 '사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 사물 편을 읽으면서, 이어령 선생이 소개한 사물들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그 책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 외에도 이어령 선생이 정의한 문장 깊은 곳에 숨겨진 원석들을 캐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는 유난히 '가위바위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8장 우리: 너 누구니'에 소개된 '가위바위보'이야기를 보자.

"예수는 두 주먹을 쥐지도 않았고 두 손을 모두 펴지도 않았다. 주먹과 보자기...그러기에 그는 생의 가위바위보에서 이길 수가 있었다. 주먹의 언어와 보자기의 언어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시인은 예수처럼 슬프고도 행복하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그 끔찍한 가위를 이길 수가 있다." - 244p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가위를 막는 것은 주먹이지만, 보자기는 자기의 품 안에 주먹까지도 감싸버린다. 그래서 상대의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밑줄을 치며 읽어야하는 책이다. 밑줄을 칠 뿐 아니라 밑줄 친 문장을 필사해가며 읽으면 더 좋은 책이다. '밑줄'에 대해서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누구나 독서를 하지만 나는 요령이 있다. 어디에 밑줄을 쳐야 하는가를 안다. 그러다 보니 관계없는 책들을 읽어도 엮을 줄 안다. 말로 읽어도 되로밖에 못 내놓는 사람이 있지만, 되로 읽고 말로 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읽으면서 이 책, 저 책을 꿰어놓는다." - 163p


천재인가 싶다. 그러나 그는 '물음느낌표'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거든.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겨도 나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는 것이 내 인생이고 그 사이에 하루하루의 삶이 있었지." - 312p


이어령 선생은 '물음표는 씨앗이고, 느낌표는 꽃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인생'이었다고 한다. 물음느낌표 사이의 존재, 이것이 깨달음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제, 내가 그랬듯이 다른 분들도 <이어령의 말>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으며 삶을 돌아보길 바라면서 서평을 마친다. 서평이 아니라, 읽은 느낌이다. 어찌 평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