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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볼차노는 끝없이 펼쳐진 평면적인 포도밭과 저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굴곡진 절벽이 대비되는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마치 알프스라는 스펀지에 볼차노라는 돌맹이를 던진 것처럼 산맥의 사이에 쏘옥 파고든 모양이죠.
덕분에 볼차노 도심 어디에서든 조금만 멀리 내다본다면 돌로마이트 토양으로 인해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를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볼차노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맥의 지류에 위치한 산악 도시라는 게 실감되는 순간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 압도적인 모습의 산자락을 타고 시선을 옮기다 기금수탁은행 보면 어디에서든 포도밭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맥의 능선을 타고 이어진 포도밭은 또 다른 경외감을 자아내게 합니다.
산악 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선조들이 산지에 계단식 농법을 도입해 농지로 개간했다면, 이들은 포도나무를 식재했던 겁니다. 산등성이마다, 계곡마다 포도나무를 심은 이들의 와이너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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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차노 시내의 표지판. 독일어와 이탈리아어가 함께 표시된다. [사진=전형민 기자]
쿠르타치, 절벽과 함께 즐기는 다양한 와인
볼차노 시내에서 차로 20분 남짓, 학원강사과외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오르면 칸티나 쿠르타치(Cantina Kurtatsch)가 나타납니다. 쿠르타치의 매력은 누가 뭐라해도 ‘절벽뷰’입니다. 와이너리 소유 포도밭은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지만, 양조장 위에 건설한 테이스팅 시설은 직각으로 솟은 절벽과 포도밭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뷰를 갖췄습니다.
참고로 알토 아디제 와인 특판정기예금 생산자들은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다른 칸티나(Cantina)라는 조직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요. 직역하면 ‘협동조합’이라는 뜻입니다. 적게는 농가 수십가구에서 많게는 수백가구가 뭉쳐서 포도를 생산하고 함께 양조하는 구조입니다. 농가 한 곳이 직접 와인을 양조하거나, 양조자에게 포도를 파는 형태가 대부분인 현대 와인기업의 형태와는 사뭇 다르죠.
상여금이란 협동조합은 척박한 고산 지형과 불확실한 날씨에 시달리던 이 지역 농가들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농가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공동체로 뭉쳐 가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알토 아디제(Alto Adige·볼차노 주변 아디제 강 상류이자, 이 지역 와인의 지리적 원산지 표기)의 와인은 바로 이 연대의 산물입니다.
쿠르타치 와이너리의 테이스팅 테라스에서 바라본 수직 절벽과 포도밭의 풍경. [사진=전형민 기자]
특히 쿠르타치의 경우, 그 다양성이 극대화됐습니다. 해발고도 200m에서 900m까지 이어지는 포도밭은 낮은 고도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Merlot) 같은 레드 와인을, 높은 고도의 서늘한 기후에서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피노 비앙코(Pinot Bianco) 같은 화이트 와인을 최적의 조건으로 생산합니다.
이렇게 한 와이너리 안에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꽤 드문 일입니다. ‘산이 곧 와인메이커’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결코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와이너리 한편에 마련된 테이스팅 테라스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바라보는 절벽의 경치는, 단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머릿 속의 복잡한 생각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는 청량감을 줍니다.
쿠르타치 와이너리 가장 높은 포도밭에서 바라본 계곡의 모습. [사진=전형민 기자]
트라민, 화려한 향들의 고향
볼차노 남쪽엔 자전거 동호인들에게 ‘환상의 길’로 불리는 스트라다 델 비노(Strada del Vino·와인의 길)가 있습니다. 150㎞ 정도의 길 중간에 마주하는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 트라민은 국제 포도품종인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의 본고장이기도 하죠. 이미 이름 자체가 ‘트라민에서 온 향신료 같은 포도’를 뜻합니다.
1898년 이 마을에서 설립된 칸티나 트라민(Cantina Tramin)은 그 명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와이너리입니다. 이들의 와인은 ‘향신료 같은 포도’라는 뜻에 걸맞게 장미꽃잎과 라일락, 리치와 망고, 그리고 흰 후추 같은 향신료가 겹겹이 쌓여 독특한 아로마를 완성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됐습니다.
라이딩 도중 트라민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시음하는 자전거 애호가들. [사진=전형민 기자]
‘와인의 길’을 달리던 자전거 동호인들은 물론, 드라이빙을 즐기는 관광객까지 누구나 와이너리에 들러 합리적인 가격에 게뷔르츠트라미너의 본고장에서 고품질 게뷔르츠트라미너 와인을 즐깁니다.
현대적인 와이너리 건물 역시 인상적입니다. 게부르츠트라미너의 풍부한 향이 공기 중에 스며들듯, 건물 외관을 감싸는 초록색 기둥들은 주변 알프스 풍광에 녹아들듯 어우러집니다.
아울러 트라민 와이너리에서는 그 유명한 에포칼레(Epokale)를 구매할 수도 있습니다. 에포칼레는 게뷔르츠트라미너로 만든 최고급 와인으로 꼽히죠. 어쩌면 게뷔르츠트라미너라는 품종 특유의 화려함 속에 잘 간직한 트라민 마을의 순수한 매력을 느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트라민 와이너리에서 바라본 포도밭 풍경. 저 멀리 돌로미티 산맥이 황혼에 빛나기 시작한다. [사진=전형민 기자]
페터 제머, 정점 그리고 군계일학
물론 알토 아디제의 모든 와이너리가 협동조합인 것은 아닙니다. 전체의 10% 미만이라는 적은 숫자지만, 당연히 개별 와이너리도 존재하죠. 1928년 가족에 의해 설립된 페터 제머(Peter Zemmer)가 대표적입니다.
페터 제머의 피노 그리지오(Pinot Grizio)는 이미 업계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와인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밝고 투명한 산미가 마치 여행자의 발걸음처럼 경쾌하고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와인 애호가라면 이곳의 샤도네를 꼭 맛보라고 추천하겠습니다. 만약 블라인드 테이스팅이었다면, 아마 평생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최고급 화이트 와인인 몽라쉐(Montrachet)를 사랑했다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조차 이 와인을 몽라쉐라고 혼동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페터 제머의 피노 그리지오. 피노 누아의 변종인 피노 그리지오는 껍질이 회색빛을 띠는 청자주색(그레이-퍼플)이라 Grigio(회색)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전형민 기자]
실제로 페터 제머의 샤도네는 저렴한 가격 때문에 ‘빈자(貧者)의 몽라쉐’라 불리지만, 오히려 몽라쉐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절제된 화려함과 그속에서 잘 갈무리된 산도, 시간이 지날수록 뿜어져 나오는 고소한 내음은 감히 알토 아디제 화이트 와인의 정점이라고 부를만 했습니다.
페터 제머는 자신들의 와인 속에 돌로미티의 풍경과 현대적인 세련미를 동시에 담는 게 목표라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 전통 품종뿐 아니라 피노 네로(Pinot Nero·피노누아), 메를로 등 국제 품종을 재배하며 실험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알토 아디제 포도밭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고도 중 하나인 최고 고도 1100m에 펼쳐진 포도밭은 세상 속의 별천지를 연상케 했습니다. 솟아난 절벽 위에 위치한 이 포도밭에서 즐기는 점심 식사는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겁니다.
페터 제머 와이너리 포도밭에서 자라는 피노누아. [사진=전형민 기자]
티펜브루너, 성곽 속의 와인 테이스팅
티펜브루너(Tiefenbrunner)는 1848년부터 와인을 만들어온 알토 아디제의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가족 와이너리입니다. 와이너리 초입에는 멋진 고성이 우뚝 서있어서 대부분 협동조합인 이 지역 와이너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와이너리의 대표작은 ‘펠트마샬 폰 페너(Feldmarschall von Fenner)’ 입니다. 독일어로 ‘페너 가문의 육군 원수’ 혹은 ‘페너 가문 출신 야전사령관’라는 뜻인데, 실제로 백수십년 전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였던 가문의 선조가 직접 개간한 포도밭에서 포도를 생산하고 양조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티펜브루너 와이너리의 레스토랑. 고성에서 맛있는 와인과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사진=전형민 기자]
1000m 가까운 고지대에서 재배한 뮐러-투르가우(Müller Thrugau) 품종으로 만드는 이 와인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토 아디제의 기후와 떼루아를 가장 순수하게 담아낸 결과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티펜브루너는 와이너리는 내부 고성(古城)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합니다. 누구나 멋스런 고성에서 와인과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죠. 고풍스럽고 신비로운 고성에서의 시음은 단순히 풍미를 맛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발효된 언어를 읽는 일임을 실감케 해줄 것입니다.
수확을 마친 포도송이들. [사진=전형민 기자]
경계선에서 터득한 공생의 묘수
알토 아디제 지역은 단일 민족인 우리로써는 상당히 이색적인 지역입니다. 이탈리아의 특수자치주(Provincia Autonoma)지만 주민이 즐겨쓰는 언어는 독일어일 정도로 독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때문에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여러 문화가 뒤섞여 나타납니다. 와인 표기조차 알토 아디제라는 이탈리아 공식 표기와 수드티롤(Sud Tyrol·남티롤)이라는 독일 문화권 표기가 공존해 혼동을 줍니다.
하지만 직접 돌아다녀본 볼차노는 이탈리아도, 오스트리아도 아닌 제3의 공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성당을 빼닮은 볼차노 두오모의 지붕은 이 도시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고, 거리 표지판에는 이탈리아어와 함께 독일어가 병기돼 있었습니다.
볼차노 시내의 한 가게에 걸린 티롤 표지판. 알토 아디제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를 남티롤(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는 북티롤에 속한다)이라고 지칭한다. 티롤 표지판 너머로 인스부르크 대성당의 지붕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볼차노 두오모 지붕이 보인다. [사진=전형민 기자]
그리고 이곳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언어와 문화를 이유로 서로 싸우거나 반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랜 기간 부딪치면서 터득한 공생의 묘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특성을 반영하듯 이곳에서 만난 와인 역시 단순한 취향의 기록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와인은 자신들의 역사와 기억을 저장한 병이자 교류를 이어주는 잔, 문명을 기념하는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의 와인은 돌로미티와 같은 대자연이자, 있는 서로의 그대로를 품는 포용이었습니다.
*이번 와인프릭은 알토 아디제 와인협회 초청으로 방문한 와이너리들의 탐방기입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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