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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일드 투어> 스틸


ⓒ ㈜디오시네마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규슈와 이웃한 혼슈 최서단 야마구치현. 지역 아트센터 '야마구치 YCAM'에 일군의 중학생과 대학생이 모인다. 이들은 '야마구치 DNA 도감' 워크숍 신용보증재단중앙회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한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이 워크숍에선 참가자들이 조를 이뤄 도시와 시골 곳곳을 탐사하며 식물 표본을 채취하고 기록해 로컬 DNA 지도를 작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관련 전공 대학생이 가이드가 돼 중학생들의 조사 활동을 조력하는 구조다.
3개의 조로 나뉜 이들은 각자의 활동을 주말을 이용해 진 차량유지비 비과세 행한다. 대학교 1학년 '우메'는 중학교 3학년 '타케'를 지원하는데, 타케의 친구 '슌'도 호기심에 프로그램에 합세한다. 우메의 제안으로 셋은 다음 주말에 조사 겸 근처 숲으로 탐험을 떠나기로 한다. 고교 입시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던 두 소년은 우메의 권유 덕분에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나 마치 아마존 밀림처럼 다가오는 울창한 지역 숲속에서 작은 모험을 개인파산선고 즐긴다. 늪지대를 횡단하고 미지의 성채를 발견하며 셋은 금방 가까워진다.
가이드 없이 마치 형제처럼 보이는 두 소년도 나름대로 열심히 인근을 조사하러 다닌다. 간식을 나눠먹고, 탐사에 걸맞은 장비도 챙겼다. 야마구치현은 여러 바다와 만나는 땅이다. 인접한 규슈와 좁은 해협으로 유입되는 동해의 한류, 일본을 구성하는 여러 큰 섬을 연결해주는 새마을금고 통장압류 세토 내해의 온화한 조류가 만나는 곳이다. 소년들은 바닷가를 산책하며 작지만 기이한 형상의 물체들을 발견하며 신기해 한다.
우메의 동기 '야마자키'는 한 무리의 유쾌한 여중생 군단과 동행이 된다. 이들은 겨울이라 눈이 쌓인 제법 높은 뒷산에 도전한다. 깔깔거리며 쉴 틈 없이 요란법석인 여학생들을 따라다니려면 정신이 쏙 빠질 텐데, 야마자 검색해보세요 키는 묵묵히 뒤를 받치며 가파른 산길을 함께 등정한다. 만만하지 않은 여정이지만, 지대에 따라 달라지는 식생을 포착한 소녀들은 도시의 반복된 풍경과 사뭇 다른 산악 풍경에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마침내 그들이 사는 지역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꼭대기에 도달한 일행은 발견의 기쁨과 묘한 설렘이 교차하는 흥분을 누린다.

야마구치 아트센터의 소박하지만 독창적인 교육 실험










▲  <와일드 투어> 스틸


ⓒ ㈜디오시네마




한국의 청소년이 경험하는 공적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은 대학입시로 통한다. 내신등급은 공공연히 계급 서열처럼 통용돼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 이념을 내부에서 허물어뜨리는 데 한몫 단단하게 저지르는 중이다. 이런 지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도입해 봤지만, 대학입시로 블랙홀처럼 모든 게 빨려드는 근본 구조를 혁파하지 않고는 아무리 참신한 대안을 내놓아봐야 탱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오죽하면 제도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시한 대안학교,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농어촌전형까지 편법의 도구화가 될 지경이다.

옆 나라 일본 역시 우리랑 도긴개긴 처지이긴 하지만, 묘하게도 일본 대중문화를 통해 들여다본 그 동네 청소년들에겐 기묘한 에너지가 발산됨을 목격하곤 한다. 저들도 대학입시에 목매는 건 물론, 한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중고교부터 서열이 나뉘어 소위 '에스컬레이터 전형'(중-고-대 동일재단 계열 진학)이 이뤄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 그런 지형 속에서 청춘을 보내는 이들의 일상엔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지곤 한다. 여름방학, 동아리 활동, 학교 축제를 둘러싼 풍경은 내신이나 경력에 딱히 '+' 효과가 없을 텐데도 열정이 넘친다. 물론 다양한 분석과 준거가 요구되는 문제일 테지만, 그런 장면들은 부러움과 선망으로 보는 이의 마음 한구석에 퇴적되곤 한다.
<와일드 투어> 역시 그런 한 예시에 해당할 테다. (대입과 직결하는) 1지망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목매도 시원찮을 시간에 식물 표본 채취를 위해 주말을 몽땅 바쳐야 한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별다른 불만이나 민원은 보이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열심히, 그리고 약간은 일탈을 누리는 기분으로 이 과외활동에 열심히 매달린다. 낯설고 부러운 풍경이다. 공식화된 체험학습의 요식행위를 초월해 워크숍 취지에 걸맞게 자신들이 살아가는 지역의 다양성을 몸소 확인하는 기회는 오히려 선물처럼 비춰질 정도다.
조사의 자유도가 높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정해진 코스를 미리 획정하고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니라, 직접 선택해 고른 지역을 조사할 수 있도록 재량을 열어놓았다. 청소년들은 반쯤은 모험을 떠나는 심정으로, 하지만 뻔한 식물군을 벗어나고자 이것저것 궁리해 산과 들, 바다로 흩어진다. 그들이 발견해 수집한 것들은 '콩짜개덩굴', '멀구슬나무', '풀고사리', '간버섯', '봄맞이 냉이', '털 수세미 이끼' 등 어른들도 알지 못하는 것투성이다.
청소년만 아니라 센터의 책임자도 지역의 다채로운 식물 종에 대해 사실 잘 모른다며 프로그램 참석자들 앞에서 미리 자백한다. 교육의 전형적 일방성을 벗어난 작은 전복이 애초 전제되는 셈이다.
심지어 '불명'으로 표기된 결과도 제법 나온다. 물론 표본 수집 과정의 착오도 있겠지만, 워크숍 오리엔테이션에서 설명하듯 어쩌면 이들이 희귀종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고향의 자연 생태계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은 분명히 획득했을 테다. 그런 독특한 체험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게 정해진 평점보다 과연 의미 없는 일인가? 부러우면서 참고할 법한 현장교육 사례로 모자라지 않다.

쌍방향 평등교육 관점에 입각한 영상 실험










▲  <와일드 투어> 스틸


ⓒ ㈜디오시네마




하지만 <와일드 투어>는 대안 교육 홍보를 위한 계몽용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미야케 쇼 감독은 독창적 방식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혼재된 실험을 통해 내용과 형식이 통합되는 실험에 도전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작업에 임했다. 영화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듯 실제 센터의 워크숍 과정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협업하는 형태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냥 겉치레가 아니라 영화의 모든 전모가 그렇게 서로 연결해 있다. 실제 워크숍 과정이 고스란히 영화의 주요 전개로 활용되고, 중학교 3학년 참가자들이 각본과 연출 과정에 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며 진행된다. 기본적인 촬영은 조사를 나간 청소년의 주변에 항상 일행처럼 붙어 다닌 감독의 스마트폰에 의지한다.
이런 '다이렉트' 그 자체인 촬영방식은 그저 현장 이동의 편의성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일본 중부 일대에서 가장 시골로 통하는 야마구치 지방의 자연을 누비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이들을 따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겠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스태프를 대거 거느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모든 촬영을 감당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로 인해 비 전문배우 참가자들은 영화가 제작된다는 의식을 최소화한 채 그저 본인들의 조사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다큐멘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장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노리고' 작업한 것이다.
여기에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이분법을 명시하면서도 경계를 허무는 도전도 감행한다. 스마트폰으로 배우들을 촬영하는 특유의 질감에 더해, 조사 기록을 위해 청소년들은 자연히 자신들의 휴대전화로 거듭 사진을 찍고 영상을 녹화한다.
카메라 안에 카메라. 카메라 밖의 카메라가 서로 중첩되며 독창적인 화면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디지털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촬영할 때 이미지에 표기되는 시간과 날짜 형식은 이 영화에서 막을 나누는 표기로 고스란히 전용된다. 2018년 2월 3일부터 동년 4월 14일까지의 배경이 그 덕에 척척 명시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기계적 구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이 처한 시간적 상황을 각인하는 효과로 두텁게 쓰인다. 투박해 보이는 연출에 다 '계획'이 있었다.
그런 영화적 야심 덕분에 초반에는 그저 극도로 일상 풍경을 섬세하게 다루려는 일본영화 특유의 개성을 변주하는 것으로만 보이던 게, 점점 미야케 쇼가 후속작품을 통해 그만의 고유한 카메라로 인정받는 경지로 이행하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여겨지니 초반부에 별 게 아닌 듯 스치던 오래된 주택 담벼락의 작은 덩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낙엽까지 예사롭지 않다. 우리가 사는 평범한 공간이 이렇게 다채롭고 신비로운 곳이었던가 싶을 정도의 세밀함이다. 영화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평범해서는 불가능한 업이란 게 새삼 진하게 수긍된다.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한 청춘과 첫사랑 일기장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난 작은 모험, 낯선 산천에서 겪던 특별한 소풍, 여기에 부모나 학교의 통제 없이 부대끼는 이성이라면 꿈결 같은 두근거림이 배양될 이상적 환경이다. <와일드 투어>는 청소년이 16살 즈음이면 누구나 품는 희미한 떨림을 명민하게 포착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는 몇 갈래의 사랑과 우정 사이 관계가 형성되다 사라지곤 한다. 어떤 순간은 그저 한겨울에 더 강렬한 한낮의 햇살처럼 스치고 지나칠 테지만, 또 다른 순간은 제법 오랫동안, 어쩌면 고향의 기억과 함께 불현듯 되돌아올 종류의 것이다. 우정을 배신하는 연적으로의 경쟁 관계가 갑자기 돌출하고, 이성적으론 설명하기 힘든 뜻밖의 문득 설렘이 바람처럼 스친다.
물론 그런 두근거림은 한두 달만 지나면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질 테지만, 그 순간은 진심일 감정의 편린. 연상연하 벽을 돌파하고픈 소망은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마음속 항변으로 맺히고, 품지만 말고 후련하게 고백하는 게 맞다는 애정어린 훈수가 따른다. 보다가 절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옆에서 괜히 끼어들어 훈수하거나 참견하고파 근질근질할 게 눈에 선하다.

미야케 쇼 감독의 이름을 한국의 관객에게 각인시킨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이 선물해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색다른 풍경과 작가의 독자적 카메라 각도의 모든 단초가 <와일드 투어>에서 비롯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하고 세심한 배려의 기원도 본 작품을 통해 목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 주목해야 할 일본영화의 미래가 카메라 너머로 주시하는 '세계' 시작점을 거슬러 발견할 기회다.










▲  <와일드 투어> 포스터


ⓒ ㈜디오시네마




[작품정보]

와일드 투어Wild Tour2019｜일본｜청춘 성장 드라마2025.03.12. 개봉｜67분｜전체관람가감독/각본/촬영/편집 미야케 쇼출연 이토 호노카, 야스미츠 류타로, 구리바야시 다이스케수입/배급 ㈜디오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