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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인 저를 대변한다고 느껴지는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좌절했어요.” 시민단체 활동가 가람(41)은 최근 수년간 정치적인 무력감을 크게 느꼈다.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남성과 여성 어느 쪽으로도 규정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연극인 이리(47)도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여성 의제로 ‘출생률이 이렇게 낮아서 어떡할 거냐’라는 이야기만 나오는” 상황에 “내 정치인이 없다”고 느낀 지 오래다. 지난해 열린 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회에 입성한 정치인 가운데 페미니스트임을 재개발 임대아파트 내세운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가람과 이리를 비롯해 여성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페미니스트 40여명은 ‘다시 뛰는 여성 정치’(다뛰여)란 이름 아래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일요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일대를 함께 달리고 있다. 오는 5월 열리는 제25회 여성마라톤에 함께 출전해 10㎞를 완주하자는 구체적인 목표도 세웠다. 페 통신신용불량 미니스트가 모여 함께 뛰자고 처음 제안한 이는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이다. 그는 지난해 2월 달리기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하프마라톤(21㎞)을 2시간 안에 완주하며 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 운동에 앞서 “일단 꾸준히 만나 운동하자”는 말에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과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대책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한양대 대학원 전 의원은 “서로 경쟁하고 헐뜯는 게 일상인 정치와 달리, 격려와 응원, 환대의 문화가 발달한 ‘러닝 크루’ 문화를 여성 정치에 옮겨 오면 좋겠다”고, 박 전 위원장은 “페미니스트로서 더 의연하게 살아가려면 체력과 연대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 러닝 크루 ‘다뛰 u보금자리론 여’ 회원들이 지난해 12월15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 다뛰여 제공


지난해 12월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이후 각자의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와중에도 ‘다뛰여’는 계속 뛰는 중이다. 이들 다수는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나가고 있다. 그리곤 다음 워크아웃제도 날 집 밖으로 나와 함께 첫 구간(전체 6.8㎞ 중 1㎞)을 달리며 전날 집회 경험, 앞으로의 정세 전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머지 5㎞ 구간은 각자의 속도에 맞게 흩어져 달린 뒤 모임을 마무리 한다.
가람은 “분노하고 좌절하기 쉬운 시기에 무력감에 빠지기보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 호흡을 옆에서 느끼는 느슨한 연결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강사 미정(51)은 “광장에 나가 뜨겁게 달아오른 다음 날, 오로지 자신과 동료 여성들의 발걸음 소리에만 집중한 채 회복하는 시간을 더 많은 여성이 함께 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혼자선 뛸 엄두가 나지 않던 먼 거리를 달릴 용기가 생겼다는 이도 있다. “지난해 9월 달리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2분 연속 뛰기도 너무 힘들었던”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혼자였다면 ‘오늘은 그냥 쉬자, 여기까지만 하자’ 하기 쉬운데 여러 사람과 함께 뛰니 핑곗거리를 찾지 않고 계속 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성탄절엔 혼자 12㎞를 뛰어냈다. “1㎞당 7분이라는 늦은 속도지만 ‘한 시간 반 정도는 멈추지 않고 뛸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성취감이 컸어요.” 먼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면서 일상 속 자신감도 커졌다. 이리는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버스를 잘못 타거나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잦다. 그는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는 어느 정도 (길을 잘못 들더라도) 내 다리로 뛰어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 러닝 크루 ‘다뛰여’ 회원들이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에서 함께 달린 뒤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다뛰여 제공


장혜영 전 의원은 전력 질주해 승부를 내기 위해선, 일상 훈련이 잘 돼어 있어야 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진보정치, 그리고 여성정치를 돌아보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승부의 달리기’만 열심히 해 온 것 같은데 ‘다뛰여’를 통해 ‘훈련의 달리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어요.”
정인선 기자 r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