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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는 원색의 체크무늬 코트를 입고 명동을 활보하던 멋쟁이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명동 ‘인싸’였던 셈입니다. 그는 화가뿐만 아니라 문인들과도 우정을 나눴습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와 특히 친하게 지냈죠. ‘광장’을 쓴 최인훈은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인기 수필가였지만 천경자는 근본적으로 화단의 슈퍼스타였습니다. 그의 개인전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고, 관객들은 싸인을 모네타계산기 받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죠. 천경자는 자신이 쥔 것들을 모두 놓고 홀연히 세계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창작의 영감을 위해 명예로운 교수직을 포기하고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이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집어삼켜 버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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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천경자 화백의 모습. <천경자 재단>




무직자소액대출 ◆ 귀여움을 독차지한 어린 시절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천경자의 외가는 대대로 부잣집이었는데요. 그는 외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외조부는 천경자를 금지옥엽처럼 여기며 ‘옥자’라는 본명을 지어줬습니다. 그리고 ‘옥자야’를 줄여 ‘짜야 짜야’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옛날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천 기업은행개인대출 경자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흥미와 재능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갑니다. 이때쯤 부유했던 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천경자의 아버지가 노름으로 전답을 날렸기 때문입니다.

유학 시절 천경자가 할아버지를 그린 ‘조부상’, 할머니를 그린 ‘노부’는 연달아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천경자는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식량이 귀해 고구마로 끼니를 때운 날이 잦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전 재산이 날아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합니다.



천경자, ‘생태’, 1951




◆ 상실과 슬픔 속에서 뱀을 그리다
고국으로 온 천경자는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생활력이 약하고 무능했습니다. 남편은 수학 교사를 하다 그만두고 여기저기 떠돌면서 생활했죠. 천경자는 미술 교사를 하면서 가장이 돼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후 그의 남편은 행방불명됐습니다. 이후 천경자는 김남중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유부남이었죠. 천경자는 통제력을 잃고 두 번째 남자와 헤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임신했는데,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아이를 뗀 후에 그가 다시 천경자를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질긴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천경자는 셋방살이하면서 친정 부모를 모시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끼던 여동생 옥희는 결핵에 걸렸습니다. 언니를 따라 화가가 되려던 옥희는 홍익대 입학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의 죽음과 남자와의 갈등, 가난으로 힘든 시기에 천경자는 그림을 그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특히 광주에 있는 뱀집에 가서 뱀들을 관찰하며 스케치했습니다. 천경자는 “징그럽고 무서운 뱀을 그림으로써 나는 생을 갈구했고, 그 속엔 저항과 뜨거운 열기가 공존하는 저력이 심리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생태’입니다. 이 작품 속 뱀들은 엉킨 채 꿈틀대고 있습니다. 천경자는 이 작품을 ‘대한미협전’에 출품하려 했지만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걸리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대한미협 전시는 부산 칠성다방에서 열렸는데요. 천경자가 다방 주방에 처박아둔 ‘생태’가 소문나면서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주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천경자는 홍익대 교수이던 김환기로부터 같은 대학 채색화 교수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천경자는 당시 광주에 살았는데요. 두 번째 남자는 본처와 천경자 사이를 여전히 왔다 갔다 했죠. 그는 광주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갑니다. 서울에서 천경자는 홀로 엄마이자, 교수, 작가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큰딸을 모델로 그린 ‘정’이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게 됩니다. 고개를 숙이고 축 늘어진 커다란 해바라기밭 사이에 소녀가 앉아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를 안은 소녀는 놀란 듯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천경자, ‘정’, 1955





천경자, ‘두 사람’, 1962




◆ 행복한 시절
천경자의 두 번째 남편은 1960년 참의원(상원)에 당선됐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교도소에 수감됐습니다. 남편이 옥살이를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천경자는 이 행복한 시절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두 사람’에서 남녀는 커피를 마시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근심은 없어 보입니다. 배경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고, 테이블 위 화병에도 꽃이 가득 꽂혀 있습니다. 천경자는 당시 느낀 행복을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색채로 표현했습니다. ‘비 개인 뒤’도 작가의 즐거움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맑은 날만 있을 것처럼 집 밖에는 우산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천경자는 강렬한 원색을 흰색으로 중화한 채색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이같은 채색 기법은 서양의 유화를 연상시킵니다.




천경자, ‘알라만다의 그늘II’, 1985




◆ 고독과 권태 속 떠난 세계여행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지만 천경자는 오히려 작가로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도시 생활에서 영감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려면 교수직을 병행할 수 없었습니다. 안정적인 교수직을 포기하고 작가로서 승부를 걸었습니다. 천경자는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돈이 모이면 또다시 여행을 갔습니다. 그렇게 그는 미국과 남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천경자는 여행을 다니며 그린 풍경화 속에 자신과 닮은 여인을 그려 넣었습니다. ‘알라만다의 그늘II’는 천경자가 타히티를 다녀온 후 그린 작품입니다. 알라만다꽃이 피어있는 야생에서 벌거벗은 여인이 누워있습니다. 뒤에는 표범이 그를 지켜주듯 눈을 뜨고 있는데요. 여성의 다리는 표범과 같이 변해있죠. 천경자는 평소 호피 무늬 옷을 즐겨 입었기에 이 그림은 일종의 자화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느낀 황량한 고독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 중 49페이지는 마흔 아홉살인 작가의 나이를 뜻합니다. 작가는 광활한 초원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코끼리 위에 앉아 있습니다. ‘초원’도 아프리카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동식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자연 속에서, 여성은 코끼리 위에 엎드린 채 상념에 잠겨 있습니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천경자, ‘내 슬픈 자화상의 22페이지’, 1977




◆ 천경자의 여성들
천경자는 많은 여인 그림을 남겼습니다. 영화 속 비극적인 여주인공이나, 실제로 알고 있던 이상적인 여성, 또 자신을 구원해줄 초월적 능력을 가진 여인들을 그렸죠. 미술평론가 최광진 박사는 “천경자의 인물상은 비록 자신을 모델로 삼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투영했다는 점에서 자아상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스물두 살의 자신을 떠올리며 그린 자화상입니다. 목이 긴 이 여성의 눈에는 슬픔이 잠겨있습니다. 머리에는 20대 때 천경자가 열중해서 그린 뱀이 있습니다. 뱀 네 마리는 마치 화관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길례 언니’는 맑고 청순한 눈망울을 한 여성입니다. 길례 언니는 실제로 천경자가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인물인데요. 멋쟁이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천경자, ‘길례 언니’, 1973




◆ 상처로 남은 ‘미인도’ 진위 논란
1991년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다 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미인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의 재산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990년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품을 복제해 판매했는데, 이 목록에 ‘미인도’도 포함됐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가 그림을 직접 보여달라고 했죠.

당시 이 그림을 본 천경자는 “그림이란 것이 자기의 심장을 부딪쳐 가면서 하는 것”이라며 “이 그림은 허깨비 같고 기가 막힌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림은 자기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자식 같은 것”이라며 “저 그림은 통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도 했죠.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감정 후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 천경자를 ‘자식도 몰라 보는 정신 나간 작가’로 만들어버린 셈입니다.
상처받은 천경자는 절필 선언을 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식처럼 소중히 간직한 작품 93점을 기증했죠. 그는 2015년 고국이 아닌 뉴욕에서 타계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근 몇 년간 ‘미인도’ 사건으로만 세간에 오르내렸습니다. 그가 위작이라고 항변한 ‘미인도’ 사건에 가려 천 화백이 그린 수많은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채색화는 한국 동양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천 화백은 상실과 고독 속에서 자신의 한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였습니다. 천 화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유족은 ‘미인도’와 관련한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2025년 새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 화백의 한은 늦게라도 풀릴 수 있을까요.

정유정 기자의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작가의 대표 작품을 살펴보며 우리가 몰랐던 예술가의 뒷이야기를 파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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