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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400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 릴게임신천지 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1979년 12월 13일 서울 중구 중앙청(현 서울시청 자리) 앞에 제2기갑여단 소속 전차가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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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원고가 잔뜩 있다고 들었어요. 정권 끝나면 세상에 나올 줄 알았는데…"
신연숙(71)은 40년도 더 된 기억을 어렵사리 되살려냈다. 기자들이 일하던 편집국 한편에는 가로로 길쭉한 연녹색 목제 서랍장이 있었다. 일종의 봉인함이었다. 취재는 했지만 신문에 실을 야마토릴게임 수 없었던 ‘문제 기사’가 그 안에 쌓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독재자가 권좌를 8년 가까이 지키는 사이, 연숙은 해직당해 신문사를 떠났지만 ‘서랍장 속 기사는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사건'의 취재 원고도 분명 거기 있을 것 같았다. 46년 전 겨울, 초년 기자 10여 명이 목숨을 걸고 밤새 취재했던, 새 독재자의 바다이야기합법 등장을 알리는 기사였다.
신연숙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75년 한국일보에 입사한다. 하지만 6년 차이던 1980년 8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언론 탄압에 저항했던 신연숙 등 기자들을 대거 강제해직시킨다. 사진은 신연숙의 대학 졸업 당시 모습(왼쪽)과 현재(오른쪽)의 모습. 신연 바다이야기온라인 숙이 들고 있는 자료는 당시 썼던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다. 그는 대학가 축제를 소개한 기사를 썼는데 그 밑에는 '부산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로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이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들은 방조자'라는 메모를 적어놨다. 민경석 기자
한남동의 총성… 목숨 건 취재가 시작됐다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3.9도까지 떨어졌던 초겨울 저녁, 조성호(당시 35세·사건팀 부팀장)는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건물 3층 편집국 사회부 철제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자 직속 상사인 캡(사건팀장)이 ‘밤샘 대기’를 지시한 터였다.
“치안본부(현 경찰청)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군 내부 동향이 심상치 않다더라. 야근자가 아니더라도 사건팀 기자들은 퇴근할 생각하지 마."
1979년 어느 날 밤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본사의 편집국 풍경(12월 12일 당일 사진은 아님).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리 낀 회사 창밖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어둠이 막 내려앉은 세종대로에는 퇴근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줄지어 달렸고, 경복궁(①)은 동절기를 맞아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유독 편집국에만 불길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해도 사회부장(당시 41세)은 자리에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기자들의 불길한 '촉'은 틀리지 않았다.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조성호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등 현장을 취재했다. 하지만 그가 취재한 내용은 검열에 걸려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은 그가 젊은 시절 서울 중구 중학동에 있던 한국일보 사옥 편집국에서 업무 중 포즈를 취한 모습(위)과 현재의 모습(아래). 민경석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탕 탕··· 탕 탕 탕" "드르륵"
대여섯 발의 권총 격발음과 M16 연발 사격음이 밤공기를 타고 도심에 퍼졌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20분. 장소는 광화문이 아닌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이었다.(②)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 지 47일 만에 현대사의 흐름을 바꿀 총성이 또 울린 것이다. 작전명 '생일집 잔치'. 야망을 숨기지 않던 마흔여덟 투스타 장군이 저지른 비극의 서막이었다.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이다. 기자들의 목숨 건 취재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건팀 막내 기자 안재현(당시 26세)은 그날 야근이었다. 그는 초록색 신문사 로고가 박힌 세단의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국방부 등이 있는 용산이었다. 남산1호 터널을 빠져나오자 소총을 든 군인들이 차를 노려봤다.
"정지! 한남동 쪽은 위험 지역으로 진입을 금지한다."
도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차량이 뒤엉키고, 총성에 놀라 급히 유턴하려다 중앙선 넘어 달리던 차와 부딪히기도 했다. 초짜 기자는 뭔가 큰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회사에 보고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1979년 12월 12일, 퇴근길 갑작스러운 교통 통제 탓에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 위가 꽉 막혀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현은 가까스로 용산 한남동에 진입해 총성이 울린 현장 주변에 차를 댔다. 이윽고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얼룩무늬 군복 차림의 군인이 초병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③) 중무장한 아군끼리 공격하는 상황은 반란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목격한 바를 취재수첩에 옮겨 적었다. 재현은 그날 국방부와 육군본부, 한남동 공관촌 등을 부지런히 돌며 전쟁터가 된 현장을 기록했다. 신출내기 기자가 겁 없이 국방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국방부 출입 기자는 크게 놀랐다.
"야, 너 굉장히 위험했어. 누가 총을 쐈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그래픽=송정근 기자
기사 네 편에 담긴 '쿠데타의 밤'
그날 밤, 죽을지 모를 현장에서 역사를 기록한 건 재현만이 아니었다. 사건팀 소속 기자 10여 명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취재했다. 회사를 지키던 성호는 자정 너머 남산 아래 필동으로 향했다. "반란군을 장갑차로 밀어버리겠다"며 진압에 열을 올린 장태완 소장의 수도경비사령부가 그곳에 있었다. 전차가 길목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성호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함께 현장에 갔던 사진 기자가 탱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무장한 군인에게 '당신은 어느 쪽 부대요?' 하고 물었죠. 군 내부 분란이 있다고 들었으니 당연히 소속을 확인해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언론사 차를 타고 왔는데 설마 죽이겠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총을 든 사내가 '너네들 죽을래?'라며 소리쳤어요.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해 흩어졌죠."
새벽 시간, 다시 회사로 들어온 성호는 창밖을 내다봤다. 경복궁 서편 멀리에서 요란한 무한궤도(바퀴 둘레에 강판 벨트를 걸어놓은 장치) 소리가 들렸다. 전차와 군용트럭이 세검정 방향에서 시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하나회 소속 노태우 소장이 이끄는 9사단 29연대와 이상규 준장의 제2기갑여단 병력이었다. 정부 부처가 있는 중앙청을 장악하려 서울로 진입하던 차였다. 전차엔 포탄이 장전돼 있었다. 승부의 추는 내란세력에 사실상 기울었다.
12·12 군사반란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젊은 기자들은 목숨 걸고 취재한 한밤의 상황을 정리한 뒤 회사로 전화해 알렸다. 1개 분대 병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공관에 접근해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는 점,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정 총장의 부관 이재찬 소령이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다는 사실, 탱크 등 중화기의 이동, 심야 총성 탓에 불안해한 시민의 목소리···. 새벽 4시, 마지막 판 신문을 찍어낼 윤전기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진실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렇게 200자 원고지 14매 분량의 기사 4편에 '쿠데타의 밤'이 기록됐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성호는 13일 자 조간신문 1면을 살폈다. '신현확 총리 임명 동의' '오늘 새 내각 발표' 'TV 시청료 월 800원으로 인상'… 심야 시내에서 벌어진 격전을 담은 기사는 없었다. 밤사이 군부가 검열해 '보도 불가' 지침을 받은 탓이다.
하루 뒤인 14일 자에는 12일 밤, 군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하지만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이 아닌 노재현 국방장관이 전날 발표한 담화를 받아쓴 기사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돼 조사받고 있는데 이는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와 관련해 숨겼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범인으로 전두환이 아닌 정승화를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짠 각본대로였다.(④) 기사에는 12일 밤 총격전 속에 사람이 죽고, 최전방 병력이 서울로 진군했던 상황을 단순히 '군 수사기관과 정승화 사령관 공관 경비 병력이 가벼운 충돌을 일으켰다'라며 촌극처럼 표현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1979년 12월 13일 자 한국일보 1면. "군 수사기관이 조사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관련해 숨기던 사실을 확인해 그를 연행 조사 중"이라는 노재현 국방 장관의 특별담화를 받아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약 12·12 당일과 이후 상황을 언론이 제대로 보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12·12 군사반란을 오래 취재한 전 한국일보 기자 이계성은 "그렇다"고 했다.
"전두환의 집권 계획에 제동이 걸렸을 수 있죠. 당일 상황은 해프닝이 아니었어요. 서울이 자칫 불바다가 될 수 있을 만큼 일촉즉발의 위기였죠. 이 사실이 알려지고,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 국민들에게 전해졌더라면 신군부가 쉽게 권력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테죠."
편집국 안 공기가 급격히 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군인들이 편집국에 들어와 편집국장 등 데스크(편집국 간부)를 수시로 만났다. 전두환식 언론 검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사흘 뒤인 15일. 편집국 서무 직원은 여느 날처럼 게시판 역할을 하는 진녹색 칠판에 그날의 검열 지침을 적었다.
"12·12 '사태'는 12.12 '사건'으로"
신군부는 '사태'라는 표현의 어감을 불편해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반란을 두고 별것 아닌 '사건'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용어조차 조작하도록 언론계를 압박했다. 성공한 내란 세력은 제멋대로 정보를 통제했다.
'아빠는 용기 내지 못했지만...'
신문에 실을 수 없는 기사가 늘어났다. 매일 군인들에게 검열받아야 했는데 ‘가(可)’ 도장을 받은 기사만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신군부는 '안보 위해' '사회불안 조성' 등 온갖 구실로 기사를 도려냈다. 사실은 '보도하려는 내용이 군부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위한 터고르기 작업이었던 셈이다.
기자들의 무력감은 깊어갔다. 3년 차 법조기자였던 최규식(당시 26세)에겐 정승화 재판 취재가 아픈 기억이다. 그는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계엄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정승화의 공판에 들어갔다. 징역 15년형을 구형한 군 검찰의 논리와 이를 부인하는 피고인 측 변론을 빠짐없이 적었다. 잠시 휴정한 사이 규식과 타사 기자들은 기사를 송고하려고 재판정 밖에 모였다. 이때 사복 차림의 남성이 다가와 '써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설명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소속 요원이었다. 기자들은 기사를 조금이라도 살려보려 남성과 논쟁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보안사령부 검열팀이 재판정에 나와 상부 지시에 따라 기사 일부를 못 쓰게 했어요. 정승화의 변소(辯訴) 같은 것 말이죠. '나는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할 것을 사전에 몰랐다' '김재규가 나를 이용했다'라는 내용은 다 빠졌어요."(⑤)
그래픽=송정근 기자
계엄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돼 첫 재판을 받으러 가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왼쪽 두 번째)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기자들은 12·12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의 군사반란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쓰지 못했다. 정승화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자 국내 모든 신문은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취재를 쓸모없게 만드는 검열 탓이었다.
젊은 기자들은 속만 끓였다. 군부와 경영진의 압박을 막아주지 못하는 간부급 선배들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무기력도 이해됐다.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설명하던 규식은 대뜸 1980년 태어난 첫아들의 이름을 말했다. 오로지 유(唯), 참 진(眞). 유진이라고 했다.
“아들 이름에라도 아빠의 마음을 담고 싶었어요. ‘아빠는 강하게 저항할 용기를 못 냈지만 너는 참되게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나중에 아이가 커서 ‘아빠는 그때 어떻게 행동하셨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워낙 컸을 때니까요.”
규식은 군부 탄압에 더 거세게 맞서지 못했던 자책감을 그렇게라도 풀어내려 애썼다.
연녹색 서랍장에 '삭제된 진실'이 쌓였다
신문에 실을 수 없다고 취재마저 포기한 건 아니다. 연숙은 “10·26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포고령에 언론 검열을 명시했지만 웬만한 건 다 취재했다”고 했다. 10·26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있었다. 규식은 시해 사건 이틀 뒤인 28일 '궁정동 술자리'에 박 전 대통령과 동석했던 가수 심수봉을 어렵게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등이 전혀 알려지지 않던 때다.
"'주간 한국'의 연예부 기자가 '심수봉이 궁정동에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해줬어요. 둘이 심수봉이 사는 송파구 장미아파트를 찾아갔죠. 초인종을 누르니 모친이 나왔고 집 안에 앉아 2시간쯤 온갖 얘기를 다 했어요. 심수봉은 얼굴만 간신히 봤는데 여전히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이었죠. 모친은 딸이 궁정동 만찬에 있었다고 확인해줬어요."
특종 거리였지만 보도할 수 없었다. 검열단은 10·26 사건과 관련해서는 군 수사 당국이 발표한 내용 외에는 쓰지 못하도록 했다. 11월 8일에는 '시해 사건과 관련된 두 여자(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심수봉과 여대생 신재순) 보도는 절대 금지'라는 검열 지침까지 내려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 네 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녹색 서랍장에는 원고가 쌓여갔다. 분노 대신 순응하는 이들도 생겼다. 12·12 당일 사건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를 지시했던 캡은 이듬해 회사를 그만둔 뒤 신군부가 만든 사회정화위원회(⑥)의 위원이 됐다. 신문 제작을 책임지던 편집국장도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주축이 된 민주정의당에 합류해 금배지를 단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괴로움은 양심을 저버리지 못한 젊은 기자들의 몫이었다. 1980년 4월 입사한 문화부 막내 기자 김주언(당시 26세)도 그중 하나였다. 주언은 늦은 오후, 잉크 냄새가 빠지지 않은 종이 뭉치를 안고 총 든 군인이 입구를 지키는 서울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검열 공장이었다.
<2회에서 계속 / 12월 4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공개됩니다>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① ①46년 만의 보도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기자 admin@gamemong.info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포고령 제3항은 권력이 언론을 암전한 45여 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게 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독재 권력이 등장할 때, 가장 먼저 장악하려는 것이 언론이며 언론인은 독재자의 탄압과 가해를 가장 혹독히 겪는 직업군이다.
한국일보는 12·3 불법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1980년 전후 권력이 지운 400개의 기사를 발굴해 뒤늦게 독자들께 배달하면서, 비록 기사를 신문에 싣 릴게임신천지 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취재하고 처절하게 맞섰던 당시 본보 기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기록했다.
1979년 12월 13일 서울 중구 중앙청(현 서울시청 자리) 앞에 제2기갑여단 소속 전차가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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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원고가 잔뜩 있다고 들었어요. 정권 끝나면 세상에 나올 줄 알았는데…"
신연숙(71)은 40년도 더 된 기억을 어렵사리 되살려냈다. 기자들이 일하던 편집국 한편에는 가로로 길쭉한 연녹색 목제 서랍장이 있었다. 일종의 봉인함이었다. 취재는 했지만 신문에 실을 야마토릴게임 수 없었던 ‘문제 기사’가 그 안에 쌓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독재자가 권좌를 8년 가까이 지키는 사이, 연숙은 해직당해 신문사를 떠났지만 ‘서랍장 속 기사는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사건'의 취재 원고도 분명 거기 있을 것 같았다. 46년 전 겨울, 초년 기자 10여 명이 목숨을 걸고 밤새 취재했던, 새 독재자의 바다이야기합법 등장을 알리는 기사였다.
신연숙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75년 한국일보에 입사한다. 하지만 6년 차이던 1980년 8월 전두환의 신군부는 언론 탄압에 저항했던 신연숙 등 기자들을 대거 강제해직시킨다. 사진은 신연숙의 대학 졸업 당시 모습(왼쪽)과 현재(오른쪽)의 모습. 신연 바다이야기온라인 숙이 들고 있는 자료는 당시 썼던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것이다. 그는 대학가 축제를 소개한 기사를 썼는데 그 밑에는 '부산 전역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로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이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들은 방조자'라는 메모를 적어놨다. 민경석 기자
한남동의 총성… 목숨 건 취재가 시작됐다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3.9도까지 떨어졌던 초겨울 저녁, 조성호(당시 35세·사건팀 부팀장)는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건물 3층 편집국 사회부 철제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자 직속 상사인 캡(사건팀장)이 ‘밤샘 대기’를 지시한 터였다.
“치안본부(현 경찰청)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군 내부 동향이 심상치 않다더라. 야근자가 아니더라도 사건팀 기자들은 퇴근할 생각하지 마."
1979년 어느 날 밤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본사의 편집국 풍경(12월 12일 당일 사진은 아님).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리 낀 회사 창밖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어둠이 막 내려앉은 세종대로에는 퇴근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줄지어 달렸고, 경복궁(①)은 동절기를 맞아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유독 편집국에만 불길하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해도 사회부장(당시 41세)은 자리에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기자들의 불길한 '촉'은 틀리지 않았다.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한 조성호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등 현장을 취재했다. 하지만 그가 취재한 내용은 검열에 걸려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은 그가 젊은 시절 서울 중구 중학동에 있던 한국일보 사옥 편집국에서 업무 중 포즈를 취한 모습(위)과 현재의 모습(아래). 민경석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탕 탕··· 탕 탕 탕" "드르륵"
대여섯 발의 권총 격발음과 M16 연발 사격음이 밤공기를 타고 도심에 퍼졌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20분. 장소는 광화문이 아닌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이었다.(②)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 지 47일 만에 현대사의 흐름을 바꿀 총성이 또 울린 것이다. 작전명 '생일집 잔치'. 야망을 숨기지 않던 마흔여덟 투스타 장군이 저지른 비극의 서막이었다.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이다. 기자들의 목숨 건 취재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사건팀 막내 기자 안재현(당시 26세)은 그날 야근이었다. 그는 초록색 신문사 로고가 박힌 세단의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국방부 등이 있는 용산이었다. 남산1호 터널을 빠져나오자 소총을 든 군인들이 차를 노려봤다.
"정지! 한남동 쪽은 위험 지역으로 진입을 금지한다."
도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차량이 뒤엉키고, 총성에 놀라 급히 유턴하려다 중앙선 넘어 달리던 차와 부딪히기도 했다. 초짜 기자는 뭔가 큰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보고 들은 것을 빠짐없이 회사에 보고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1979년 12월 12일, 퇴근길 갑작스러운 교통 통제 탓에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 위가 꽉 막혀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현은 가까스로 용산 한남동에 진입해 총성이 울린 현장 주변에 차를 댔다. 이윽고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얼룩무늬 군복 차림의 군인이 초병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③) 중무장한 아군끼리 공격하는 상황은 반란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목격한 바를 취재수첩에 옮겨 적었다. 재현은 그날 국방부와 육군본부, 한남동 공관촌 등을 부지런히 돌며 전쟁터가 된 현장을 기록했다. 신출내기 기자가 겁 없이 국방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국방부 출입 기자는 크게 놀랐다.
"야, 너 굉장히 위험했어. 누가 총을 쐈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그래픽=송정근 기자
기사 네 편에 담긴 '쿠데타의 밤'
그날 밤, 죽을지 모를 현장에서 역사를 기록한 건 재현만이 아니었다. 사건팀 소속 기자 10여 명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취재했다. 회사를 지키던 성호는 자정 너머 남산 아래 필동으로 향했다. "반란군을 장갑차로 밀어버리겠다"며 진압에 열을 올린 장태완 소장의 수도경비사령부가 그곳에 있었다. 전차가 길목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성호는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함께 현장에 갔던 사진 기자가 탱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어요. 무장한 군인에게 '당신은 어느 쪽 부대요?' 하고 물었죠. 군 내부 분란이 있다고 들었으니 당연히 소속을 확인해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언론사 차를 타고 왔는데 설마 죽이겠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총을 든 사내가 '너네들 죽을래?'라며 소리쳤어요.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해 흩어졌죠."
새벽 시간, 다시 회사로 들어온 성호는 창밖을 내다봤다. 경복궁 서편 멀리에서 요란한 무한궤도(바퀴 둘레에 강판 벨트를 걸어놓은 장치) 소리가 들렸다. 전차와 군용트럭이 세검정 방향에서 시내로 진격하고 있었다. 하나회 소속 노태우 소장이 이끄는 9사단 29연대와 이상규 준장의 제2기갑여단 병력이었다. 정부 부처가 있는 중앙청을 장악하려 서울로 진입하던 차였다. 전차엔 포탄이 장전돼 있었다. 승부의 추는 내란세력에 사실상 기울었다.
12·12 군사반란 시간순 정리. 그래픽=송정근 기자
젊은 기자들은 목숨 걸고 취재한 한밤의 상황을 정리한 뒤 회사로 전화해 알렸다. 1개 분대 병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공관에 접근해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는 점,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정 총장의 부관 이재찬 소령이 순천향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다는 사실, 탱크 등 중화기의 이동, 심야 총성 탓에 불안해한 시민의 목소리···. 새벽 4시, 마지막 판 신문을 찍어낼 윤전기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진실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렇게 200자 원고지 14매 분량의 기사 4편에 '쿠데타의 밤'이 기록됐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성호는 13일 자 조간신문 1면을 살폈다. '신현확 총리 임명 동의' '오늘 새 내각 발표' 'TV 시청료 월 800원으로 인상'… 심야 시내에서 벌어진 격전을 담은 기사는 없었다. 밤사이 군부가 검열해 '보도 불가' 지침을 받은 탓이다.
하루 뒤인 14일 자에는 12일 밤, 군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하지만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이 아닌 노재현 국방장관이 전날 발표한 담화를 받아쓴 기사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돼 조사받고 있는데 이는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와 관련해 숨겼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범인으로 전두환이 아닌 정승화를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짠 각본대로였다.(④) 기사에는 12일 밤 총격전 속에 사람이 죽고, 최전방 병력이 서울로 진군했던 상황을 단순히 '군 수사기관과 정승화 사령관 공관 경비 병력이 가벼운 충돌을 일으켰다'라며 촌극처럼 표현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1979년 12월 13일 자 한국일보 1면. "군 수사기관이 조사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와 관련해 숨기던 사실을 확인해 그를 연행 조사 중"이라는 노재현 국방 장관의 특별담화를 받아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약 12·12 당일과 이후 상황을 언론이 제대로 보도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12·12 군사반란을 오래 취재한 전 한국일보 기자 이계성은 "그렇다"고 했다.
"전두환의 집권 계획에 제동이 걸렸을 수 있죠. 당일 상황은 해프닝이 아니었어요. 서울이 자칫 불바다가 될 수 있을 만큼 일촉즉발의 위기였죠. 이 사실이 알려지고, 책임 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 국민들에게 전해졌더라면 신군부가 쉽게 권력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테죠."
편집국 안 공기가 급격히 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군인들이 편집국에 들어와 편집국장 등 데스크(편집국 간부)를 수시로 만났다. 전두환식 언론 검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사흘 뒤인 15일. 편집국 서무 직원은 여느 날처럼 게시판 역할을 하는 진녹색 칠판에 그날의 검열 지침을 적었다.
"12·12 '사태'는 12.12 '사건'으로"
신군부는 '사태'라는 표현의 어감을 불편해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반란을 두고 별것 아닌 '사건'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어 용어조차 조작하도록 언론계를 압박했다. 성공한 내란 세력은 제멋대로 정보를 통제했다.
'아빠는 용기 내지 못했지만...'
신문에 실을 수 없는 기사가 늘어났다. 매일 군인들에게 검열받아야 했는데 ‘가(可)’ 도장을 받은 기사만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신군부는 '안보 위해' '사회불안 조성' 등 온갖 구실로 기사를 도려냈다. 사실은 '보도하려는 내용이 군부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위한 터고르기 작업이었던 셈이다.
기자들의 무력감은 깊어갔다. 3년 차 법조기자였던 최규식(당시 26세)에겐 정승화 재판 취재가 아픈 기억이다. 그는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계엄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정승화의 공판에 들어갔다. 징역 15년형을 구형한 군 검찰의 논리와 이를 부인하는 피고인 측 변론을 빠짐없이 적었다. 잠시 휴정한 사이 규식과 타사 기자들은 기사를 송고하려고 재판정 밖에 모였다. 이때 사복 차림의 남성이 다가와 '써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설명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소속 요원이었다. 기자들은 기사를 조금이라도 살려보려 남성과 논쟁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보안사령부 검열팀이 재판정에 나와 상부 지시에 따라 기사 일부를 못 쓰게 했어요. 정승화의 변소(辯訴) 같은 것 말이죠. '나는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할 것을 사전에 몰랐다' '김재규가 나를 이용했다'라는 내용은 다 빠졌어요."(⑤)
그래픽=송정근 기자
계엄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돼 첫 재판을 받으러 가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왼쪽 두 번째)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기자들은 12·12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의 군사반란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쓰지 못했다. 정승화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자 국내 모든 신문은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취재를 쓸모없게 만드는 검열 탓이었다.
젊은 기자들은 속만 끓였다. 군부와 경영진의 압박을 막아주지 못하는 간부급 선배들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무기력도 이해됐다.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설명하던 규식은 대뜸 1980년 태어난 첫아들의 이름을 말했다. 오로지 유(唯), 참 진(眞). 유진이라고 했다.
“아들 이름에라도 아빠의 마음을 담고 싶었어요. ‘아빠는 강하게 저항할 용기를 못 냈지만 너는 참되게 살았으면 좋겠어’라는. 나중에 아이가 커서 ‘아빠는 그때 어떻게 행동하셨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워낙 컸을 때니까요.”
규식은 군부 탄압에 더 거세게 맞서지 못했던 자책감을 그렇게라도 풀어내려 애썼다.
연녹색 서랍장에 '삭제된 진실'이 쌓였다
신문에 실을 수 없다고 취재마저 포기한 건 아니다. 연숙은 “10·26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포고령에 언론 검열을 명시했지만 웬만한 건 다 취재했다”고 했다. 10·26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도 있었다. 규식은 시해 사건 이틀 뒤인 28일 '궁정동 술자리'에 박 전 대통령과 동석했던 가수 심수봉을 어렵게 만나기도 했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등이 전혀 알려지지 않던 때다.
"'주간 한국'의 연예부 기자가 '심수봉이 궁정동에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해줬어요. 둘이 심수봉이 사는 송파구 장미아파트를 찾아갔죠. 초인종을 누르니 모친이 나왔고 집 안에 앉아 2시간쯤 온갖 얘기를 다 했어요. 심수봉은 얼굴만 간신히 봤는데 여전히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이었죠. 모친은 딸이 궁정동 만찬에 있었다고 확인해줬어요."
특종 거리였지만 보도할 수 없었다. 검열단은 10·26 사건과 관련해서는 군 수사 당국이 발표한 내용 외에는 쓰지 못하도록 했다. 11월 8일에는 '시해 사건과 관련된 두 여자(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심수봉과 여대생 신재순) 보도는 절대 금지'라는 검열 지침까지 내려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하는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 네 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녹색 서랍장에는 원고가 쌓여갔다. 분노 대신 순응하는 이들도 생겼다. 12·12 당일 사건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를 지시했던 캡은 이듬해 회사를 그만둔 뒤 신군부가 만든 사회정화위원회(⑥)의 위원이 됐다. 신문 제작을 책임지던 편집국장도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주축이 된 민주정의당에 합류해 금배지를 단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괴로움은 양심을 저버리지 못한 젊은 기자들의 몫이었다. 1980년 4월 입사한 문화부 막내 기자 김주언(당시 26세)도 그중 하나였다. 주언은 늦은 오후, 잉크 냄새가 빠지지 않은 종이 뭉치를 안고 총 든 군인이 입구를 지키는 서울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검열 공장이었다.
<2회에서 계속 / 12월 4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공개됩니다>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① ①46년 만의 보도
• 46년 전 겨울 내란의 밤, 이제야 그 기사를 배달합니다(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314400001938)
• 46년 전 계엄 때 삭제된 기사 352개, 어떻게 입수했나(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2916320001408)
•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1914530005155)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기자 admin@gamemong.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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